무속과 여성

1. 직업인으로서의 무녀

 무당이라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직장이다. 사실상 한국의 여성들은 명확한 직업을 가진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무당은 나라에 무포세라는 세금을 냈기 때문에 당당한 직업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당이라는 직업은 일반 종교 사제에 비해 다양한 일을 수행해야 했다. 우선 무당은 사제이다. 사제는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바치는 약속을 한 자이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원래 결혼을 하지 않는 전통도 유지되어 왔다. 그만큼 헌신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세습무는 쿠라는 의례만 하지만, 강신무는 점쟁이이기도 하고 이중 역할을 한다. 평상시는 집에서 요시흉을 점하고, 점의 결과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쿠도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당은 의료 관계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도 침을 치는 무당이 적기 때문에 특히 병 쿠를 잘 하는 무당도 있다. 아기가 찢어지거나 눈에 별눈이 생기는 등 병이 들면 무당을 찾아 간단한 액불을 하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조에는 동서활인원과 같은 빈민구호 의료기관에 반드시 의무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는 국가에서도 무당의 의료적 행위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당은 연예인 역할을 맡았다. 원래 쿠라는 예술적 행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무당은 음악적 구성에 의해 무가를 노래하고 춤춘다. 강신무는 칼 위에 올라가는 등의 묘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무도는 그 사회의 예능 전반에 걸쳐 활동했다. 쿠의 후반부는 놀이로 구성되어 있었고, 놀이터에서 가장 인기있는 사람은 무당이었다. 전라도에서는 수성구점집 무당 속에서 판소리 광대가 나타나고, 야요이도 무당 출신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도 무당은 일반 여성과 다르지 않은 가정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 사제와 구별된다. 무당의 가정은 역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무도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집이 정하는 남자에게 맞서 아내에게 갔다. 세습무의 경우, 상대는 반드시 같은 세습무의 가정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강신무는 결혼한 후에 무당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만일 혼인 전에 무당이 되면 출신에 관계없이 결혼 조건이 불리해졌다. 무당들은 모두 아내 앞에서 현주에 다해 아이를 낳고 생활해 가는 것이고, 일반인과 똑같은 생활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무당으로서 사제와 의료행위와 연예인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당은 가장 세속적인 생활을 보내는 사제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 무녀의 가정과 가족

 무녀의 가정생활은 매우 불규칙하고 안정감이 없다. 무녀는 언제 일을 하게 될지 정확히 모르겠다. 마을의 쿠의 경우에는 일취를 정해 준비하지만, 사람이 죽고 나서 하는 쿠는 정해진 날이 없기 때문이다. 또 쿡이 있으면 며칠이라도 유수하게 하는 것이 배움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쿠는 밤을 밝히는 것이 보통 마을의 쿠는 적어도 하룻밤 많으면 10일은 걸리기 때문에 제대로 생활을 하는 무녀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며칠 동안 어머니가 부재중이 될지 모르고 정서 불안해진다. 강신무는 대체로 집에서 길흉을 차지한다. 또 쿠에 필요한 제물을 무당의 집에서 준비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무녀의 가정은 언제나 얽히고 있어 침착이 없고, 가족이 안정감 있는 편안한 가정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상태이다.
이처럼 무녀는 돈을 벌기 위해 가정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무당의 남편은 종종 ‘기둥정주’라고 불린다. 기둥처럼 서 있는 것만으로 돈을 벌거나 가정을 하지 않는 무능한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무당이기 때문에 받는 사회적 멸치를 견디기가 어렵다. 따라서 어머니에게 적대적인 경우가 많다. 기독교나 기타 다른 종교를 믿고 어머니와 헤어지는 아이도 적지 않다. 무녀는 열심히 돈을 벌지만 가족들은 그 공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일로 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강신무의 경우, 무당이 되는 과정에서 가족의 희생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다. 인바시(인타리)라는 것이 그것이다. 인터리는 무당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가정에서 가족 누군가가 장난치 않고 죽는 것을 말한다. 가족의 죽음을 통해 무당이 하나님께 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가족의 죽음이 바로 신과 무당의 걸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흥미롭지 않은 가족의 죽음에 의하면 입무자는 하나님의 뜻이 강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받아들여 무당이 된다.

 3. 무녀의 사회적 위치

 무녀는 무속이라는 종교 사제이지만 사회적으로 심하게 소외된 존재이기도 하다. 신성한 사람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존재로서 차별을 받았다. 무속신앙에서는 평소 일상생활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시 신과 가까운 존재의 무당도 멀어졌다. 다만 죽음이라든지 병이 되어 일상의 리듬이 손상되었을 때는 무당을 불러 쿠를 의뢰한다. 이 정도로 무당에 대처한 것이다. 신의 열렬한 사람은 일반인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남자들은 강신무를 가까워지면 인연이 나쁘다고 경원한 이야기까지도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조 사회에서 무당은 호민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존경어를 사용해 최저변의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이 바로 무녀였다. 그런데 세습무는 여성만이 사제가 된다. 남자는 여자가 쿠를 할 때 음악을 반주하고 돕는 것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세습무의 가정이 되면 역시 남성 중심이다. 쿡은 여자가 하지만 마을의 쿡처럼 규모가 큰 쿠의 계약은 남자의 역할이었다. 대구용한점집 전국적 조직을 가지고 있던 세습무 등의 신청(또는 재인청)은 철저히 남자 중심으로 운영됐다. 신청은 판소리 광대와 줄다리기 광대, 농락 산세와 같은 유명한 민속 예술가를 키우는 온상이었지만, 여자들은 이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처럼 세습무가의 여자들은 가정이나 사회에 있어 모두가 가장 멸시되는 존재로서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온 것이다